2012-11-13

kynodontas (Dogtooth) (2009)


감독이면서 작가로 참여한 Giorgos Lanthimos의 발칙한 상상력이 '신의 한 수'였던 영화.

세 남매는 성인의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정신능력은 일반인 기준으로 많이 부족하다. (지능의 부족보다는, 사회화의 부족과 교육의 부족일듯)
이 들을 양육하는 Father와 Mother는 이 아이들을 그동안 집밖으로 보낸적이 없다. 높은 담벼락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집안에서 이 자녀들을 이태껏 양육해 왔다. (홈 스쿨링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녹음해준 테이프를 들으면서 단어들을 익혀왔다. 근데 이 부모님의 4차원적인 교육은 자녀들에게 엉뚱한 단어를 사물에 주입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의자를 '하늘'로 부르거나, 강아지를 '세탁기'로 가르치는 셈이다. 아래 video clip을 확인해보시라.

아들래미의 사춘기를 충족시켜주고자 Father는 자신이 다니는 공장의 한 여직원에게 댓가를 지불하고 집으로 초청하게된다. 이 여직원은 아들에게 성교를 알려준다. 이 여직원에게 관심을 보이는 큰 딸. 그녀 역시 성적인 호기심이 왕성하다. 여직원에게 머리삔(자신에게는 큰 보물)을 지불하는 것으로 성을 탐닉하는 기회를 얻게된다.
자녀들은 높은 담벼락 넘어의 세상을 알고싶어하지만 이를 두려워하는 부모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용쓴다. 한번은 아버지가 가짜 피를 사용하여 고양이와 결투끝에 살아돌아왔다면서 밖의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고 환기시킨다. (아버지는 아마 연극배우 출신이리라.)
그들은 자녀들의 송곳니가 빠질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가능하다 이말이다. 간니가 자연적으로 빠지기는 힘들지 않은가?)
밖의 세상에 누구보다 관심이 있던 큰 딸은 어느날 밤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뽑아버린다. 피를 줄줄흘린 채 그녀는 아버지의 차 트렁크에 숨는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평상시 처럼 차를 타고 높은 담벼락으로 갇힌 집을 빠져나가 회사로 간다. 그 트렁크속 큰 딸은 사라진다.

이 영화가 나에게 시사한 바는 '사회화와 교육이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질만한 비극.'이다. 자녀들은 그들만의 용어를 사용한다. 비록 문법적으로는 집밖의 사회와 같더라도 지시하는 사물에 대한 단어의 뜻이 완전히 다르니 이들이 사회화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턱없이 부족한 교육으로 인해 이들은 심심한 삶을 살아왔다. 어느날 밤 세 남매는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너무나 기뻐서 춤을 본적이 없는 이들이 춤이라는 것을 추게된 것이다.
왜 그들의 부모는 자식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인가? 진정으로 기존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고 싶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그 아버지는 삶의 영위를 위해서 기존 사회에 발을 담구기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에서 나온 하나의 인상적인 scene은 큰딸과 작은딸이 Bruce라는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본다면 그 매력에 빠질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